이혼 후 자취 1달차 #01 내가 먹을 만큼 짓고, 내가 먹고, 내가 치우기
이혼 후 혼자 살기 시작한 지 딱 한 달.
아직 적응 중이지만, 요즘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내가 먹을 만큼만 밥을 하고 비워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괜찮은 일이었구나’ 하는 거다.
혼자 살게 되면서 의외로 만족감을 느낀 부분을 꼽자면,
밥통을 오롯이 내가 관리한다는 점.

내가 성주신도 아니거니와, 밥에 대단한 애정을 가진 사람도 아니지만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냥 내 밥통에 밥이 있는지, 없는지, 얼마나 남았느지, 얼마 전에 지은 밥인지.
그런 별 것 아닌 사실들을 내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는 데에서 뜻밖의 만족감을 느꼈다.
이혼 전 둘이 살던 시절에는 답답했던 부분 중 하나가
밥통을 열면 늘 무언가 ‘애매하게’ 남아 있을 때다.
보온 버튼은 켜져 있는데, 막상 열어보면 눌어붙은 밥풀떼기만 남아 있거나,
밥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미 며칠 전에 해놓고 한번도 휘젓지도 않은 새밥이 그대로 남아서 굳어버리거나.
‘언젠가 누가 먹겠지’
서로에 대한 믿음인지 미루기인지 뭐 그런 침묵 속에서
그 애매한 1인분 미만의 밥들은 결국 음식물쓰레기가 되어 버려지곤 했다.
먹지도 못할 양을 남기고, 말도 없이 굳어지고, 결국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버려지는 밥.
그게 뭐랄까 별것도 아니지만 불만을 쌓아가던 마음에 남았나보다.

이제 혼자 지낸지 1달이 지났지만, 밥통 속의 밥이 쓰레기가 되는 그런 일은 아직 없다.
밥은 내가 먹을 만큼만 짓는다. 밥통에 어느 정도의 밥이 남아있다는걸 아는 이상, 어떻게든 먹을 계획을 궁리를 한다.
함께 밥먹을 사람이 없다는 건 의외로, 모든 식사를 내 상황과 냉장고 재고에 맞춰서 챙길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
오늘 내 컨디션, 냉장고 사정, 귀찮음의 정도까지 고려해서 그때그때의 한 끼가 조합된다.
어쩌면 나 혼자 밥통을 지켜야한다는 의무감,
이제는 남에게 불만을 가질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어떻게든 잘해보자 라는 사명감.
내가 지은 밥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다.
내가 지어서, 내가 먹고, 내가 어떻게든 해치운다.
누구 눈치 볼 일도 없고, 애매하게 남길 일도 없다.
그 단순한 구조가 꽤 만족스럽다.
밥솥 뚜껑을 열었을 때, 밥이 말끔히 비워져 있으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다.

오늘도 내 몫의 밥을 잘 해내고, 다 먹고, 깨끗이 치웠다는 작은 성취감.
내가 나의 루틴을 잘 맞췄다는 신호.
누가 챙겨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챙긴다는 것.
밥이 뭐 별건가?
이 작은 밥통 하나를 온전히 내가 컨트롤할 수 있음에서 오는 만족감의 원천은
어쩌면 이혼 후의 내 삶도 그렇게 컨트롤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기도 하다.
살면서 모든 걸 계획대로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나를 먹이는 것은 내 뜻대로 계획할 수있다.
그거면 다시 삶을 계획하기에
충분한 시작이 아닐까